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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만든 인물들

루이 14세: 태양왕이 이끈 프랑스의 황금기

by 떠버리 2024.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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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는 72년 간 프랑스를 통치하며 절대왕정, 베르사유 궁전 건축, 예술의 후원자, 군사력 확장으로 프랑스를 유럽의 중심 국가로 만들었지만, 전쟁으로 인한 재정 악화와 무거운 세금 부담을 후세에게 남겼습니다.

루이 14세(1638-1715)

 

루이 14세의 생애

루이 14세(Louis XIV), 프랑스의 "태양왕"은 1638년에 태어나 1643년, 4세에 왕위에 올라 1715년, 77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72년간 프랑스를 통치하였습니다. 그가 왕위를 물려받았을 때, 프랑스는 프롱드(Fronde)의 난이라는 귀족들의 반란이 있었고 어머니 앤 오브 오스트리아(Anne of Austria)와 카디널 마자랭(Cardinal Mazarin)의 보호 상태를 유지하다 정치적 멘토인 마자랭의 사망 후 직접 국정을 장악하며 절대왕정을 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정부의 모든 부문을 통제하고, 귀족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들을 베르사유 궁전으로 불러들였습니다. 1682년, 베르사유 궁전을 공식적인 왕실의 본거지로 지정하며 프랑스 절대왕정의 상징적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영토 확장을 위해 1667년 시작된 스페인 계승 전쟁(Spanish War of Devolution), 1672년의 네덜란드 전쟁(Dutch War), 가장 유명한 1701년의 스페인 계승 전쟁(War of the Spanish Succession)이 포함됩니다. 이로써 일시적 영토 확장이 있었지만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을 주어 프랑스의 경제를 약화시켰습니다. 그의 지배는 예술과 문화의 황금기로 알려져 있는데 베르사유 궁전을 비롯한 여러 건축 프로젝트를 후원하여 프랑스는 유럽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1715년에 그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사망했습니다.

 

루이 14세의 치세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왕으로, 1643년부터 1715년까지 재위하며 프랑스 절대왕정의 전성기를 이루었고,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던 주요 행적을 연도별로 살펴보겠습니다.

1643년 루이 14세 즉위

  • 프랑스 왕 루이 13세와 왕비 사이에서 결혼 후 약 23년간 자식이 없다 1638년 태어났습니다.
  • 루이 13세는 유언으로 아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후견인으로 왕비를 지명하였습니다.
  • 1643년 4세 때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 어머니가 대리인으로서 통치권을 가지고 수하인 카디널 마자랭이 내정과 외교 정책을 담당하였습니다.

1661년 마자랭 사망 후 직접 통치 시작

  • 1661년 카디널(가톨릭 교회의 고위 성직자 직위 ) 마자랭이 사망하자 23세인 루이 14세는 직접 통치를 시작합니다
  • 초기부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는데 주력합니다.
쥘 마자랭(1602-1661)

  

1672-1678년 네덜란드 전쟁

  • 전쟁의 배경: 루이 14세는 국가 영토 확장, 유럽에서 지배적 위치 확립 의도로 네덜란드의 부와 무역 노선을 흡수하고자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 전쟁의 경과: 1672년, 네덜란드에서는 "재앙의 해"로 알려진 프랑스의 침공으로 초기에 큰 타격을 입었고, 수도 암스테르담을 위협하자 자국의 물길을 이용해 홍수를 일으켜 프랑스 군의 진격을 저지합니다.
  • 유럽의 대응: 프랑스의 팽창에 위협을 느낀 스페인, 홀리 로마 제국, 덴마크, 스웨덴 등이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대응합니다. 1673년 영국도 프랑스와 동맹에 가담하여 유럽 전역에 국제 동맹 체제가 구축되었습니다..
  • 전쟁의 결과: 1678년, 니메헨 조약으로 공식적으로 종전되었으며 프랑스에게 몇몇 영토를 인정하고 네덜란드 공화국의 주권은 유지됩니다. 프랑스의 국력을 소진이 컷고, 유럽 내 프랑스 견제가 강화됩니다.
  • 장기적인 결과: 유럽 국가들 사이의 권력 균형을 재조정되었고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프랑스의 야심에 대응하는 방법을 알았으며, 나중에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1552-1798 프랑스 왕의 영토 화장(루이 14 영역이 매우 큼)

 

1682년 베르사유 궁전 이전과 의의

  • 이전 배경: 정치적으로는 파리의 불안정한 정치 환경과 귀족들의 반란에서 벗어나려는 목적입니다.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베르사유로 수도를 옮겨 귀족들과 대중의 영향력으로부터 멀어지려 하였습니다. 건축과 정원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베르사유 궁전의 확장과 장식에 루이 14세의 취향을 반영하였습니다. 건축가 루이 르 보와 조경가 앙드레 르 노트르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참여했습니다. 왕권 중심으로 권력의 집중과 통제로 정치적 활동을 집중하려는 시도도 보입니다. 궁전은 귀족, 모든 정부 기관, 중요 인사들이 상주하며 왕의 감시 하에 있도록 건축되었습니다.
  • 이전 과정: 1682년 공식적으로 베르사유 궁전으로 정부를 이전하여 행정, 정치의 중심이 파리에서 베르사유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 궁전의 확장: 수십 년에 걸쳐 확장이 지속되어 거대한 홀, 방, 정원이 추가로 유럽에서 가장 호화로운 궁전이 되었습니다. 건축, 예술 작품에는 큰 비용이 소요되어 국가 재정에 부담을 주었습니다.
  • 문화적 중심지: 베르사유는 프랑스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고, 정기적안 연극, 음악회, 축제가 열렸으며, 프랑스의 예술과 문화가 유럽 전역에 퍼지게 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 장기적 영향: 베르사유 궁전으로의 이전은 루이 14세의 권위 강화, 절대왕정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전에 따른 재정적 부담은 프랑스 혁명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

 

1685년 퐁텐블로 칙령 (Fontainebleau Edict)

  •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관용을 철회하는 퐁텐블로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휴게노들이 프랑스를 떠나 경제적, 인구적 손실을 초래했습니다. 퐁텐블로 칙령은 루이 14세의 권위주의적 통치와 종교적 편협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받으며, 프랑스 내 종교적 관용의 철회를 의미하는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칙령은 유럽 전체의 종교 및 정치 지형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루이 14세 통치의 어두운 면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억됩니다.
  • 배경: 1598년 나랑트 칙령으로 프로테스탄트(휴게노)에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였습니다.
  • 카톨릭 교회와 왕실 내 강경파로의 반대 압력은 종교적으로 통일된 국가로 만들려던 루이 14세의 야망과 결합되어 프로테스탄트의 존재를 프랑스 내 카톨릭교의 지배와 대립되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 퐁텐블로 칙령의 주요 내용: 모든 프로테스탄트 예배와 모임이 금지되었고,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학교는 폐쇄되거나 파괴되고,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은 프랑스에서 추방되었으며 거부할 경우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습니다. 또한,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에게 카톨릭으로의 개종을 강요하였으며 거부하면 강제 노역이나 감옥에 처해질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프로테스탄트 신자의 해외 이주가 금지되었고, 많은 휴게노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프랑스를 탈출하였습니다.
  • 결과 및 영향: 약 20만 명의 휴게노가 프랑스를 떠나 영국, 네덜란드, 독일 등 인근 국가로 망명하였고 이들은 상업, 공예, 군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기술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탈로 프랑스 경제에 타격을 주었고, 망명 국가들은 이로 인해 경제적, 문화적 이득을 얻었습니다.

1701-1714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 배경: 스페인 왕 카를로스 2세가 1700년에 자손없이 사망하여 혈연 관계를 맺고 있는 유럽 왕가들은 왕위를 둘러 싼 경쟁을 합니다. 카를로스 2세는 유언장에 필리프 드 앙주(후의 필리프 5세)를 후계자로 지명했고, 필리프는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손자로 프랑스가 스페인 제국을 통제할 수 있는 계승이 됩니다.
  • 계승 주장: 오스트리아의 대공 카를(후의 황제 카를 6세)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으로 스페인 왕위를 주장하였고, 필리프 드 앙주는 보르본 가문의 일원으로 카를로스 2세의 지명을 받아 스페인 왕위에 올랐습니다.
  • 전쟁 전개: 1701년 필리프 드 앙주가 스페인 왕 필리프 5세로 즉위하자 대영제국, 네덜란드 공화국, 오스트리아 등이 대(對)프랑스 연합을 형성하여 필리프의 스페인 왕위 계승을 반대합니다. 전쟁은 스페인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 심지어 북미 및 다른 식민지에서도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 주요 사건: 1704년 블렌하임 전투, 1704년유플라흐 전투, 1706년 라미예 전투에서 연합군이 승리합니다.
  • 전쟁 결과: 위트레흐트 조약(1713년), 라스타트 조약(1714년)으로 필리프 5세는 스페인 왕으로 인정받았으나 프랑스와 스페인 왕위의 연합은 영구히 금지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벨기에, 밀라노, 나폴리와 같은 이탈리아 영토를 얻었고, 영국은 지브롤터와 메노르카 섬의 획득과 일부 식민지 노예 공급권 등 많을 것을 얻습니다.
필리프 5세(1683-1746), 스페인 국왕

 

1715년 루이 14세 사망과 후계

  •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긴 72년간의 통치로 기록되었습니다.
  • 성인이 된 자녀는 딸 마리 테레즈만이 있었으나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으며, 손자 중 한 명인 필리프 5세가 스페인 왕위에 올랐고, 루이 14세의 증손자 루이 15세가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루이 14세의 일화

"나는 국가다(L'État, c'est moi)": 이 선언이 처음 등장한 시점은 루이 14세의 사망 이후입니다. 이 일화는 루이 14세가 절대왕정의 권위를 강조하려는 의도로 말했다고 전해지지만 그가 이런 말을 했다는 명쾌한 역사적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군주로서의 위엄과 절대왕정의 정점임이 루이 14세라는 것을 상징하는 명쾌한 선언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실제 루이 14세의 통치 동안 프랑스는 강력한 중앙 집권화와 국가 기구의 통제 속에 있었습니다. 이는 루이 14세와 프랑스 국가가 동일시되었을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베르사유의 거울 갤러리(Galerie des Glaces)"와 관련된 일화로서 베르사유 궁전의 화려함과 루이 14세의 권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 갤러리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거울로 장식된 방으로 프랑스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기술과 예술을 보유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루이 14세는 거울 갤러리를 통해 외국 사절단에게 프랑스의 위엄과 번영을 과시하였습니다. 이 갤러리에 사용된 거울은 프랑스에서 직접 제작된 것으로 당시에는 유럽의 베네치아에서 거울을 수입하여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태양왕"이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프랑스 문화의 황금기를 열어 음악, 무용, 연극, 문학 등 다양한 예술 분야의 발전을 지원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은 이 시기의 예술적 성취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이며 왕의 권력과 부, 예술에 대한 애정을 세계에 과시하는 무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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