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를 만든 인물들

윈스턴 처칠: 전쟁 영웅에서 냉전 예견자까지

by 떠버리 2024. 4. 13.
반응형

영국의 전 총리 윈스턴 처칠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자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 중 한 사람이며,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을 승리로 이끈 리더십과 "철의 장막" 연설로 냉전시대를 예견하였습니다.

윈스턴 처칠(1874-1965)

 

처칠의 생애 요약

윈스턴 레너드 스펜서 처칠은 1874년에 군사적 전통이 강한 가문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는 하로 스쿨에 다녔으나 학업 성적은 뛰어나지 않았고, 문학과 역사에 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샌드허스트 왕립군사학교의 군사 교육을 받아 졸업 후, 영국 육군에 입대하여 인도, 수단 등지에서 복무하였습니다. 군 복무 중에도 전쟁 특파원으로 활동하여 여러 전투에 관한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20세기 초, 처칠은 정치 무대에 입문하여 보수당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자유당으로 당적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다양한 정부 직책을 맡으며 정치적 입지를 다져가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해군 장관으로 재직하며 갈리폴리 작전을 주도했습니다. 하지만 이 작전의 실패로 정치적 위기를 맞았고, 전쟁 후 처칠은 정치적 명성 회복에 전념하다 재무부 장관을 포함한 여러 중요한 정부 직책을 역임합니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 총리가 되어 연합국과 함께 승리합니다. 이 시기 그의 지도력과 고무적인 연설로 영국 국민을 결집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1908년 클레멘타인 호지어와 결혼하였고 정치와 글쓰기에 바쁜 그의 생활 때문에 자주 가족과 떨어져 지내오며 재정상황은 여러 저작을 통해 상당한 수입을 얻었습니다. 그의 저술 활동은 중요한 수입원이었으며, 특히 "제2차 세계대전"과 "영국 국민의 역사"는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그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처칠은 군인, 저널리스트, 작가, 그리고 정치인으로 다양한 경력을 가졌지만, 정치 경력은 영국의 내각 장관직에서부터 총리직에 이르렀으며, 냉전 초기 서방 세계의 정책 방향에 큰 영향을 미친 "철의 장막(Iron Curtain)" 연설로 앞으로 세계를 예언하기도 합니다. 1951년에 그는 다시 총리직을 맡았으나 건강 문제 때문에 1955년에 총리직에서 은퇴하였으며 생애 말년에 여러 차례의 중대한 건강 문제에 시달리다 1965년에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대를 초월한 리더십의 상징

윈스턴 처칠은 역사상 가장 설득력 있는 연설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의 국민들에게 큰 힘을 주었던 대표적인 연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래 연설들은 처칠의 리더십을 상징하며, 위기의 순간에 영국 국민을 독려하고 통합하는 큰 역할을 했습니다.

Blood, Toil, Tears, and Sweat: 1940년 5월 13일에 총리로서 영국 하원에서 첫 연설을 하면서 이 주제로 나치 독일에 대항한 영국의 전쟁 목표를 의연한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주요 내용은 "우리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승리입니다. 승리를 향해 달려가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승리는 비록 길고도 힘든 길이 될지라도, 승리, 전진적이고 확실한 승리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입니다. Never surrender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We Shall Fight on the Beaches: 위 연설 몇 주 후 1940년 6월 4일, 덩케르크에서의 대피 작전 후 처칠은 이 연설로 영국이 해변, 착륙장, 들판, 거리, 언덕에서 싸울 것이며 항복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했습니다. 주요 내용은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이고, 착륙장에서 싸울 것이고, 들판과 거리에서 싸울 것이며, 언덕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입니다.

Their Finest Hour: 1940년 6월 18일, 프랑스의 항복 후 독일과의 장기 전을 준비하며 영국 국민에게 결속을 호소했습니다. 주요 내용은 "만약 영국 제국과 그 제국이 지배하는 모든 것이 한 세대 동안 자유를 위해 싸우다가 생존한다면, 그들은 말할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가장 위대한 시간이었다.'"입니다.

The Few1940년 8월 20일, 독일 공군과의 치열한 공중전을 벌이는 중, 처칠은 이 전투에서 영국의 전투기 조종사들을 특별히 칭찬하며 그들의 용기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주요 내용은 "어느 때보다도 많은 이들이 그렇게 소수에게 그렇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입니다.

1940년 처칠 수상의 의회 연설

 

윈스턴 처칠의 냉전 예견 연설로 가장 유명한 것은 "철의 장막"입니다.

철의 장막: 1946년 3월 5일 미국 미주리주의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소련과 서방 간의 긴장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을 지적했습니다. 연설 내용은 소련이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다고 비판하였습니다. 주요 내용은 "철의 장막이 슈체친에서 트리에스테에 이르기까지 대륙을 가로질러 내려왔다"입니다. 유럽 대륙의 중부에서 발트 해안에 이르는 지역이 소련의 영향 아래에 있고, 이 장막 뒤에서는 각종 자유가 억압되고 있어 유럽 전역, 심지어 전 세계의 평화와 안보가 위협받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예술 작품과 저서

처칠은 일생 동안 반복적인 우울증으로 고생하였으며, 자신을 "블랙 도그"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해군장관으로 작전을 지휘했던 1915년 갈리폴리 전투에서 대패한 후 우울증에 걸렸고, 가족과 시골에서 휴가를 보내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우울증도 완화되었다고 한다. 1921년에 Charles Morin이란 가명으로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1922년 선거에서 패배한 후에도 역시 그림에 전념하였고, 동시에 잘 알려진 "Ther world Crisis"를 저술하였습니다. 1948년에 화가로서 공식적 인정되며 로열아카데미오브아트의 명예회원이 되었습니다.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그는 야외에서 주로 풍경화를 그렸으며, 그의 작품은 밝고 대담한 색채를 사용합니다. 그는 작품에 자연의 아름다움과 평화로움을 담으려 하였으며, 그의 작품은 생애동안 여러 전시회에서 전시되었습니다. 세간에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쿠투비아 모스크의 탑"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습니다. 처칠이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그린 유일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는 1965년 사망할 때까지 약 500점을 그렸습니다.

쿠투비아 모스크의 탑

이 작품은 모로코 마라케시의 뜨거운 태양이 모스크를 내리쬐는 풍경이며, 강렬한 햇볕 아래 따뜻한 색채와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특징이다. 1943년 모로코 카사블랑카 회담 직후 처칠은 루즈벨트 대통령과 마라케시 근처의 노을을 보게 된다.  처칠은 함께한 추억을 기념하여 다음날 이 그림을 그려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선물하였다고 한다. 훗날 배우 안젤리나 졸리가 전 남편 브래드 피트에게서 선물로 받아 10년간 소장하다가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1150만 달러(당시 약 123억 원)에 팔렸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생산적인 작가로 알려졌는데 역사적 분석과 회고록, 전쟁 보고서, 정치와 역사에 대한 생각을 담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생애 동안 40여종의 책을 출판했습니다. 1953년에 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당시 헤밍웨이도 후보였지만 그를 제치고 수상하였고, 이듬해 훼밍웨이가 수상하였습니다. 세계대전 관련 대표적인 저서로는 제1차 세계대전과 그 전후 상황에 대한 분석을 담은 "The World Crisis"와  처칠의 초기 생애와 경력에 대한 자서전 My Early "Life: A Roving Commission(1930)"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한 6권의 상세한 역사 및 개인적 해석이 담긴 "The Second World War"와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두 해를 다룬 "Triumph and Tragedy"도 그의 대표적 저서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