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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 퀴리는 폴란드 출신의 물리학자이자 화학자로 방사성 연구의 선구자입니다.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하였으며, 이 공로로 두 차례 노벨상(물리학상, 화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 과학자입니다. 

    마리 퀴리의 일생을 그린 영화 "Radioactive"

     

    마리 퀴리의 생애 요약

    1867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마리 퀴리는  여성으로서 직면한 사회적 제약과 학문적 도전으로 난관의 연속이었지만 불굴의 의지와 열정으로 이를 극복하고 물리학과 화학 분야에서 남다른 두각을 보여주며 혁신적인 발견을 이루어냈습니다. 1891년, 24세의 나이로 마리는 파리로 이주하여 파리 대학교(소르본 대학교)에서 물리학, 수학을 공부하였으며, 뛰어난 성적으로 학위를 받았습니다. 1894년, 마리는 피에르 퀴리와 결혼하여서도 함께 과학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특히, 1898년에는 폴로늄과 라듐이라는 두 개의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여 마리와 피에르에게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하게 했습니다. 이때 마리는 노벨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습니다. 1906년 피에르 퀴리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마리 퀴리가 뒤를 이어 파리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는데 이 또한 여성으로서는 처음이었습니다. 1911년에는 화학 분야에서 라듐과 방사성의 연구로 두 번째 노벨상을 수상하였고 두 개의 다른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1차 세계대전 동안 방사선 기계인 "소형 엑스레이 유닛"을 이용하여 전장에서 부상당한 병사의 치료에 기여하였고 전쟁 후에도 방사성 물질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며 파리 라듐 연구소의 설립에 기여하였습니다. 방사성 물질 연구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1934년 아플라스틱 빈혈로 인해 사망했습니다.

    마리 퀴리의 삶과 업적은 과학적 발견을 위해 직면했던 특수하고 사회적 도전을 그린 영화 "라디오액티브(Radioactive)"에서 여러 문화 작품에서 재조명되었으며, 그녀의 불꽃같은 인생 여정과 그녀가 남긴 학문적 유산의 중요성을 잘 보여 주었습니다. 마리 퀴리는 단순한 과학자를 넘어 꿈을 향한 지속성과 용기의 상징으로, 지금도 수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꼬마 퀴리와 마리 퀴리

    렌트겐이 x레이 장비를 제작한 후 이 기술은 의료 진단에 즉시 활용되었고 마리 퀴리는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을 신속하게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꼬마 퀴리라 불리는 이동식 x레이 유닛의 개발을 추진했습니다. 다음은 이에 관렫된 이야기입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 동안 방사선 촬영을 연구하던 중에 독일이 파리 시내를 폭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더 이상 연구를 진행하기 어려웠던 마리 퀴리는 전쟁터에서 병사들을 돕는 방법을 고민하다 x레이 기술이 부상 진단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병원과 의료 기관에서 고정식 x레이 기계만 사용되었기에 전쟁터에서 부상자를 진단하는 시스템이 필요했습니다. 마리 퀴리는 이동식 x레이 유닛이라 부르는 이 장비를 제작,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민간 기부금, 정부 지원금으로 확보하려 노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발전기, x레이 튜브, 필요한 조작 장비를 포함한 약 200대의 꼬마 퀴리 장치가 만들어져 수십대의 자동차나 다른 이동 수단에 설치할 수 있고, 야전 병원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그녀는 프랑스 적십자와 협력하여 '적십자 방사선과'라는 특별 부서의 설립과 운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물리적인 x레이 장비 설계와 구현, 자금을 조달, 의료진과 기술자 교육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녀와 그녀의 딸 이렌은 프랑스 전역을 돌며 병원과 임시 의료 시설에서 x레이 장비 사용 방법을 교육하였습니다. 이동식 x레이 장비는 의료진이 병사들의 골절, 탄환, 파편의 위치를 찾아 적절한 의료 처치를 하도록 지원하였습니다. 비록 마리 퀴리는 생전에 정부로부터 어떠한 훈장이나 감사도 받지 못했지만, 1934년 눈 감는 순간까지 전장에 나서서 병사들을 구한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꼬마 퀴리, 이동식 x-ray 밴

     

    라듐 추출과 장고의 노력

    퀴리 부부가 라듐을 발견 및 추출 과정은 고된 노동과 시간 소요가 필요한 작업이었습니다. 라듐은 1898년 퀴리 부부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이 원소는 자연 방사성 광물인 피치블렌드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피치블렌드의 주요 성분은 우라늄이었지만, 부부는 이 광물에서 더욱 강력한 방사성을 발산하는 무언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무언가를 채취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원료 채취: 퀴리 부부는 라듐을 추출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현재 체코 공화국)의 요아킴스탈에서 피치블렌드 광물을 가져왔고 이 광물은 우라늄 광석의 부산물이며 저렴했습니다. 나중에 라듐의 가치가 알려지면서 가격이 크게 상승하였습니다. 

    화학 처리: 옮겨온 광물을 가루로 분쇄한 후 화학적 용매와 반응시켜 다른 물질들로부터 라듐을 분리합니다. 광물을 산으로 처리하고, 그 결과물을 여러 화학적 과정을 거쳐 정제하는 단계를 거칩니다. 분쇄는 상대적으로 빠르지만 채굴 광물을 실험실로 옮기고 준비하는 데 수 일이 걸립니다. 산으로 처리하는 과정은 여러 주가 소요됩니다.

    정제 및 결정화: 반복되는 정제 과정을 거쳐 라듐 염 형태로 추출되며, 이후 순수한 라듐 염을 얻는 결정화 과정을 거이 작업은 느리고 섬세한 작업입니다. 정제 과정은 수많은 실험을 통해 불순물을 최소화하는 데 몇 달이 걸리기도 합니다.

    방사성 측정: 추출된 물질의 방사성을 측정하여 라듐의 존재와 순도를 확인힙니다.

    라듐 방사성 물질 추출 과정

     

    라듐 추출의 전체 과정은 몇 년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부부는 라듐의 존재를 처음 발견한 1898년부터 1902년까지 거의 4년 동안 순수한 라듐을 추출하기 위한 작업을 지속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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