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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귀천의 경계는 강철보다 견고하고 반상의 법도는 천지를 나누는 잣대였다. 한 인간의 이름과 신분, 그리고 삶마저 혈통과 계급이 결정하던 시대. 그런 세상에서, 구더기처럼 비천한 삶을 살던 한 노비의 딸이 양반가의 정실부인이 되어 살아간다면, 그 삶은 과연 진짜일까, 가짜일까?
1. 프로그램 정보
옥씨부인전은 신분과 운명을 모두 속인 여인의 치열한 생존 기록이자, 그녀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한 남자의 지극한 사랑 이야기다. 이는 전쟁처럼 얽힌 신분과 욕망 속에서, 옳고 그름의 경계를 묻고 진실과 가짜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이야기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마르탱 게르 사건(1542)과 조선 선조 때 가짜 남편 사건(1607)을 모티브로 삼아, 법학자 쟝 드 코라스가 기록한 『마르탱 게르의 귀환』과, 조선의 문인 백사 이항복이 남긴 『유연전』을 재해석하여 탄생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다. 이 작품은 당시의 사건을 넘어선 상상과 인간 본성의 탐구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이야기를 펼쳐 보이는 작가의 모티브를 이해할 수 있은 이야기이다. 특이하게도 두 분은 동시대를 살았다는 점입니다.
※ 장 드 코라스(Jean de Coras, 1515~1572): 프랑스의 법학자이자 법관으로, 법학 교육과 실무에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특히 16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재판 사건인 마르탱 게르 사건을 기록한 책 *"Arrest Memorable"*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은 법적 판결뿐 아니라 인간 본성과 진실을 탐구하며 문학적 가치도 인정받습니다. 코라스는 후기에 칼뱅주의자로 개종하여 종교적 박해를 받았고, 프랑스 종교전쟁 중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 오봉 이항복(吳菴 李恒福, 1556~1618):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보좌하며 국난 극복에 기여했습니다. 그는 뛰어난 학문적 소양과 재치로 유명했으며, 정철과 함께 '동방 2대 문장가'로 불렸습니다. 이항복은 왕과의 소통에서 유머와 지혜를 활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능숙했으며, 탁월한 외교 감각으로 국가 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문집 오봉집은 학문적 가치를 지니며, 그는 선비 정신과 실용적 지혜를 겸비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2. 마르탱 게르 사건(1542)
마르탱 게르 사건은 16세기 프랑스에서 실제로 발생한 사기 사건으로, 신분과 정체성을 둘러싼 논란이 법정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사건을 넘어 당시 유럽 사회와 법체계, 가족 구조, 신분제도의 단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3. 사건의 배경
■ 위치: 프랑스 남서부의 작은 마을, 아르티가(Artigat)
이 마을은 미디 피레네(Midi-Pyrénées) 지역의 아리에주(Ariège) 주에 위치하은 작은 마을이며, 피레네 산맥 근처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당시 아르티가는 농업을 주로 하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습니다. 마르탱 게르와 그의 가족은 이곳에서 생활하며, 사건의 중심 무대가 되었습니다.
■ 시기: 1542년경 사건 발생, 1559년에 법정 판결
사건은 마르탱 게르가 마을을 떠난 1542년부터 시작되어, 그가 돌아왔다고 주장한 남자가 사기 혐의로 기소되며 본격화되었습니다. 재판은 17년 후인 1559년에 이르러 결론에 도달합니다.
■ 주요 연혁
- 출생: 마르탱 다게르(Martin Daguerre)는 1524년 프랑스 헨다예에서 출생
- 이주: 1527년 가족이 아르티가로 이주하며 성을 게르(Guerre)로 바꿈
- 결혼: 마르탱은 14세에 베르트랑드 드 롤스(Bertrande de Rols)와 결혼
- 득남: 결혼 후 8년 만에 첫 아들이 태어남
- 도주: 1548년, 아버지의 곡식을 훔친 뒤 처벌을 피하기 위해 가족을 떠남
- 가톨릭 신앙 때문에 베르트랑드는 재혼할 수 없었음.
- 1556년: 아르노 뒤 틸(Arnaud du Tilh)이 마르탱 게르 행세를 하며 아르티가로 귀향
- 아르노는 마르탱의 외모와 기억을 흉내 내어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설득
- 베르트랑드는 처음에는 그를 진짜 남편으로 믿고 두 딸을 낳음
- 아르노는 마르탱 게르의 유산을 요구하며 삼촌 피에르 게르(Pierre Guerre)를 고소
- 피에르는 아르노가 가짜라고 의심하며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
- 1559년, 피에르는 마르탱 게르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아르노를 고발
- 리으(Rieux)에서 열린 첫 재판에서 150명의 증인이 소환됨
- 많은 사람들이 아르노를 진짜 마르탱 게르라고 믿었지만, 일부는 가짜라고 주장
- 재판 중 피고는 자신이 진짜라고 강력히 주장하며 무죄를 주장하였으나 사형 선고
- 툴루즈 고등법원에 상고
- 재판 도중 진짜 마르탱 게르가 의족을 단 채 법정에 나타남
- 가족과 대면한 결과, 아르노가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짐
- 아르노 뒤 틸은 사기와 간통 혐의로 유죄 판결
- 1560년 9월, 아르노는 마르티게르의 집 앞에서 교수형에 처함
- 베르트랑드와 피에르는 무고 혐의에서 벗어나 석방
4. 주요 등장인물
- 마르탱 게르 (Martin Guerre): 사건의 중심 인물로, 프랑스 라발리 마을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농부. 그는 1524년경 태어났으며, 1542년에 아내와 가족을 두고 갑자기 마을을 떠났습니다.
- 베르트랑 드 롤스 (Bertrande de Rols): 마르탱 게르의 아내로, 사건의 주요 증인이자 중심 인물. 그녀는 남편이 돌아왔다는 남자의 진술을 처음에는 받아들였지만, 이후 그의 정체에 의문을 품었습니다.
- 아르노 뒤 틸 (Arnaud du Tilh): 마르탱 게르로 신분을 위장한 사기꾼. 그는 마르탱 게르의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속이며 약 3년간 베르트랑과 함께 살았습니다. 결국 그의 사기가 법정에서 밝혀졌습니다. 결국 그는 교수형에 처해졌으며본명은 아르노 뒤 튈(Arnaud du Tilh).
- 장 드 코라스 (Jean de Coras): 이 사건의 재판을 담당한 판사. 그는 사건을 세심히 기록으로 남겼고, 후에 그의 기록은 역사적 자료로 활용되었습니다. 『Arrest Memorable』라는 제목의 책으로 사건의 전 과정을 기록하여 법적 관점뿐 아니라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았습니다.
5. 사건의 전개
† 마르탱 게르의 실종 (1542): 마르탱 게르는 아내와 자식을 두고 마을을 떠났습니다. 당시 그가 마을을 떠난 이유는 재산 문제와 개인적 불화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 아르노 뒤 틸의 등장 (약 8년 후): 아르노는 마르탱 게르로 신분을 위장하고 마을에 돌아옵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뿐 아니라 베르트랑까지 설득하며 자신의 신분을 믿게 했습니다.
† 의혹의 시작: 아르노의 말과 행동이 점차 진짜 마르탱 게르와 다르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특히 그의 삼촌인 피에르 게르가 이의를 제기하며 사건은 법정으로 넘어갔습니다.
† 법정 공방과 반전 (1559): 아르노는 법정에서 진짜 마르탱 게르임을 주장하며 세부적인 가족 이야기를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재판 도중, 실제 마르탱 게르가 법정에 나타나며 그의 사기가 폭로되었습니다. 아르노는 사기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습니다.
6. 사건의 역사적 중요성
† 정체성과 신분의 문제: 이 사건은 당시 사회에서 신분과 정체성에 대한 기록과 증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현대와 달리 사진이나 공적 신분 확인 시스템이 없던 시기에, 사람들은 기억과 증언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 법과 정의의 발전: 사건을 기록한 장 드 코라스의 보고서는 16세기 프랑스 법체계와 재판 과정에 대한 귀중한 사료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인간 본성과 기억의 신뢰성, 법적 증언의 가치를 철저히 분석했습니다.
† 사회적 구조: 사건은 당시 농촌 사회의 가족 중심적 구조와, 경제적 이해관계가 신분과 관계에 미친 영향을 조명합니다.
"진짜 마르탱 게르" 사건 직후, "비슷한 사건이 조선 시대에도 있었다면?"
👉 유연전 자세히 보기
참고1: 영화 마르탱 게르의 귀향(나무위키)
참고2: 마르탱 게르의 귀환